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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e Faust

홍 경 한,  미 술 평 론 가

1.

모든 미술(예술)은 세계를 탐구한 결과이며, 단순히 보여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본 것에 대한 반응과 보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를 핵심으로 한다. 미술은 무목적적 쾌락인 ‘미’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의 문제와 대면하여 우리의 상상력이나 반성을 촉구함으로써 현실의 삶에 참여한다.

작가 송주관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듯 미술은 공동체의 삶과 커뮤니티의 정체성, 사회적 의미를 드러내는 ‘공공재’로서의 역할이 가능할 때 비로소 참다운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의 미술은 그것이 예술 작품일 수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거나 미술 자체의 존재 이유와 방식에 관해 문제와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질 뿐, 유사한 형태를 생산해 내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실제 송주관의 예술은 사회적 실천을 지향한다. 그에게 작품이란 시각이라는 한정된 영역에 있지 않다. 시청각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은 사회 문제를 둘러싼 토론을 유도하는 비판적 장소이며, 어떤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은 창작자가 완성되었다는 판단을 내리는 순간이 아니라, 그 작품이 설치된 장소, 현상, 상황 등에서 관객과 공존할 때임을 고지한다.

송주관의 개인전 ‘Belle Faust’는 글로벌 흐름이 만들어내는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바라본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SARS-CoV-2)의 등장에 따른 팬데믹의 시간, 2022년 발생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젠 거의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은 기후위기,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과 세계의 파편화 등을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i]이라 명명한 채 동시대 오늘을 구현한다.

이는 단지 현상의 나열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현존(現存)의 인류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당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의식을 포괄한 가장 적합한 모더니티를 구축하는 방식에 방점을 둔다. 연희예술극장에서 선보인 위 개인전, 프로젝트도 그 일부이다.

송주관의 프로젝트는 지각된 대상을 인지하는 과정에서의 일련의 지식 체계와 해석의 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대상이 망막을 통해 중추에 인지되는 물리적 지각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일 수 있지만 특정한 시각매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게 하려면 기존의 여러 정보체계와 숙련된 독해의 경험이 누적되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지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직조된 여운이 있다. 자연성을 위배한 현실을 토대로 한 존재에 대한 의미 부여와 현실 너머의 세계, 그리고 초월적 영역(신을 의식하는 것으로서의 현존과 맞닿는다)을 엿보게 하는 그의 융복합 작업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학습된 결과다.

이를 다시 문화예술평론가이자 저술가로 잘 알려진 니콜라스 미르조에프(Nicholas Mirzoeff)의 시선에서 보자면 시각 사건을 연구하기 위한 일종의 ‘전술’이기도 하다. 다만 그에게 시각 이미지란 세계에 관한 도식화의 연장이고, 비극적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자 예술가의 시선을 실어내는 수단이라는 점이다.

 

 

2.

작가 송주관의 전시 테마인 ‘Belle Faust’에 대해 작가는 “사전적 의미로 ‘아름다운 주먹’, 불어의 여성 형용사(영어의 Isabella)와 독일어의 남성 명사의 결합”이라고 했다. 그는 “전능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작품 속 인물인 파우스트, 20세기 이후 현대 사회의 기반을 재편한 유럽 문화 속, 두 종교의 이념 갈등이 지울 수 없는 학살과 내전의 역사를 써 내려간 북아일랜드의 지명 ‘벨파스트(Belfast)’를 중의적으로 담은 것”이라고 덧붙였다.(‘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이자 희망과 꿈 그리고 독립투쟁의 가슴 아픈 역사[ii]를 모두 아우르는 도시다.)

주지하다시피,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눈에 띄는 건 작품 속 등장 인물 하인리히 파우스트(Heinrich Faust)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가 조약을 맺는 장면이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대가로 무한한 지식, 세속적인 즐거움, 욕망의 충족을 얻는다.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쾌락주의와 면죄부의 여행을 시작하고 그레첸(Gretchen)이라는 젊은 여성을 유혹해 몰락으로 이끈다. 그러나 결국 그레첸은 마가렛의 구원을 받으며 파우스트의 구원으로 이어진다.

송주관의 주제에는 인간 죽음과 야망, 욕망, 인간의 조건 등의 주제를 탐구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함의가 새겨져 있다. 인간 삶 속 선택의 결과, 그 의미와 성취를 위한 모든 이들의 경주가 다층적으로 놓여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옳은 것인가. 선의 체계 내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역사와 문화는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가.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다음 글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즉, 그는 “이제 인류는 오랜 세월 닦아온 역사와 문화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급한 불 끄는 방식으로 더 이상 현재의 퍼펙트 스톰을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가 없다. 방안을 모색하는 자는 이미 권력과 질서를 재편하는 것에 혈안이 된 당사자들임을 역사와 현재가 증언하고, 문화와 사상으로 치장한 우리의 이기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축화되고 작물화된 동식물들의 생애 주기와 개체 수는 인류의 식량 수요 그래프 수치로 부터 결정되고 있다는 것과, 양극화 된 권력의 이데올로기 경쟁질서가 사태의 피해자를 소외시키는 현 주소, ‘찬란한 것’으로 치장된 인류의 문화와 발전은 지질학적 시간이 제공해 준 자원의 무분별한 강탈과 ‘너’에 대한 침탈을 토대에 두고 있음을,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들다.”고 제작 기록[iii]에 썼다.

작가는 이를 다원주의적 매체를 통해 적절히 재현한다. 디지털 영상 매체 내에서 자연이 가진 패턴 구조의 알고리즘(작가에 의하면 이는 꿀벌(생태 지표종)의 춤 언어를 되살리는 분투를 담은 라바노테이션 기호)을 확장하여,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비주얼 리소스로 활용한 사운드와 디지털이 상호관계 할 수 있는 기술적 환경 구축의 일환으로 다룬다. 시각에만 천착하지 않은 채 직선적 교차를 반복하는 이미지들이 연이어 수를 놓지만 시각 본질주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건 차라리 시각성의 단계에서 이탈해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무는 학제적 연구영역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필자의 이러한 판단이 설사 정답은 아니더라도 ‘Belle Faust’에선 실험적인 태도로 기존 이미지를 전복-공유-향유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복잡한 체계를 지닌다. 프랑스의 사상가 가타리(Felix Guattari)의 분자 혁명적 해체 사유를 빌려오고 시각, 사운드(소리), 신체, 기호, 상징 등의 언어를 투입한다.

이를 조금 쉽게 전달하기 위해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디지털 영상 매체는 꿀벌(생태 지표종)의 춤 언어를 라바노테이션 기호를 통해 기록하며, 사운드는 ‘생성적(generative)’ 알고리즘으로 발생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변이 유전체들의 영향아래에서 음악의 화성과 언어의 배열 질서를 분해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텍스트의 이면에서 어떤 감정을 본다. 내게 감정이란 미적·물리적 확장을 끊임없이 도모할 수 있는 기본 단위이다. 애초 발화의 시작인 그의 (무언가에 반응하거나 선택해 기술하는) 감정 속 파편은 그 자체로 존립한다기보다 각각의 조각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해석이 되고 해체가 된다. 이는 매체 환경에 의해 구현되는 ‘의식의 조각’으로, 의식의 조각은 작가 자신이 집중해온 의제를 예술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재구성하고 보편적 ‘관계망’으로 전치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다행히 혼란스러운 장소적 상황에서도 그의 ‘의식의 조각’은 관람객에게 조용히 산포된 채 다양한 체험을 제공한다. 관람객은 매체 간의 고유한 물질성과 차이는 희석시키지 않은 채 모든 상황을 비가시적이고 공감각적인 상황으로 환원하려는 작가의 의도에 순응하게 된다. 여기서 각각의 예술은 별개임에도 본질적으로 예술의 수평과 균형을 지닌다. 더불어 음악과 행위와 시각 이미지의 병합은 어떤 학제적 패러다임을 연출하기 위한 시도와 갈음된다.

 

 

3.

예술표현과 향유자 간에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 ‘인지양식’이 있다. 만약 그것이 일정한 혹은 특정한 장소일 경우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 과정은 배가되며 지각과 기억, 상상, 개념, 판단, 추리는 더욱 명료해진다. 따라서 예술장소와 인지양식은 곧잘 비례한다.

따라서 연희예술극장이라는 독특한 공간[iv]에서 시도된 송주관의 ‘Belle Faust’ 프로젝트는 관객에게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본다’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예술작품의 창조과정에 참여해 작가와 함께하는 과정 상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는 일종의 ‘경험적 상호작용’으로, 송주관의 끊임없이 유동하는 디지털 미디어 작품과 비물질성(immateriality)의 사운드, 무용 협업 공연은 그 한 예에 속한다.

필자가 목도한 전시현장은 인지양식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서로 다른 매체 사이에 개입하여 영향을 호환하며, 새로운 유무형의 형태가 생성되는 관계성에 주목한다. 이는 개별적이자 단선적인 패턴을 매체의 다양성에 결합시켜 훨씬 다단한 공감각적 레이어(Layer)를 형성한다는 의미로, 소실점은 상호성에 의한 지각에 둔다.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재앙 및 생태적, 인위적 상황을 대면한 이가 느끼는 감성과 언어적 감각을 시각속성 내로 끌어와 공간에서 펼쳐냈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흥미로운 지점은 송주관의 경우 사운드와 미디어의 시각적 변주, 무용의 퍼포머에서 발산하는 박동과 호흡, 알 수 없거나 불확실성의 모호함마저 미적 재료로 삼았다는 것이다. 비록 관객이 작품에 신체적으로 개입하여 순간적 변형을 일으키는 작업은 아니지만 일정한 장소를 기반으로 한 이 특정적 해프닝은 미술과 삶의 소통 단절과 형식주의 미술의 미학적 관념을 배격한다.

이 중 송주관의 사운드는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개별적이다. 그것은 “음향 생태학적 관점에서 조건 발생적인 요인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무작위성을 받아들이면서 ‘정상 상태’의 질서를 수평화 시킨다. 그리고 무용의 언어는 어떠한 숨을 통해 본 프로젝트의 주제 의식에 맞닿게 되는지 실험한다.”[v]

각기 다른 언어를 갖고 있음에도 ‘협업’은 그 자체로 디지털 미디어 작품 및 무용과 어우러진 채 복합적으로 끊임없이 그리드(grid) 되거나 침범되고 결합되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각도에서의 융합 및 혼종을 호출한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공연에서 드러나는 신체의 예술은 분명 각자의 영역에서 독립적이지만, 작가가 지정한 ‘Belle Faust’ 내에서 긴장과 이완 작용을 거치며 새로운 예술형식을 도모하는 상태가 된다. 필자는 이를 보다 넓은 관점에서 경계가 무너져 중성 문화와 혼합 문화가 번성하는 상태로 본다.

이를 미학적으로 풀이하면 교조주의의 탈구축과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왕래, 이동을 통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영역확장, 새로운 가능성 모색 등과 같은 정신적, 물리적, 관념적 여정과 맞물린 모든 상태와 갈음된다. 분야와 장르 간 적극적인 교섭과 상호 이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우린 송주관의 멀티미디어적 개념을 탑재한 다원적 작품을 통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사람마다, 관객의 감수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예술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새로운 정지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사회적 ‘틈’으로서 기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린 그 틈에서 히드라(Hydra)라처럼 자라난 퍼펙트 스톰을 발견한다. 물론 그의 작업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한 동시대의 의미 있는 특징 중 하나인 시각적 혹은 비시각적 세계의 이미지화[vi]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주요 흔적들과도 연결된다.

송주관의 전시를 관람하고 공연에 대한 정보를 취합했을 때, 다소 아쉬운 건 퍼포머와 시각이 실시간 상호 관계할 수 있는 기술적인 환경 구축의 성과는 인정됨에도 예술언어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관객과 매체 간 상호작용은 설계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이것이 필수는 아니지만, 관람자의 역할을 창작자와 대등한 관계로 보는 1990년대 후반 이후 동시대 미술의 흐름에선 거리가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관객은 문화적 텍스트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창출해내는데 일조하는 능동적 존재라는 점, 공연자체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촉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부분은 작품의 가치 확장을 위해서라도 향후 고민할 문제다. ■

 

 

 

 

[i] ‘퍼펙트 스톰’은 다양한 부정적 요소나 사건이 일치하는 시나리오를 나타낸다. 문학적으로는 다양한 요인들 또는 상황들의 조합이 극도로 도전적이고, 위험하고, 재앙적인 결과를 만드는 방식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ii] 1960년대 말 이후부터는 가톨릭교도와 신교도간에 종교 갈등, 민족주의(친아일랜드) 계열 주민과 연합주의(친영국) 계열 주민들 간 분쟁을 겪었다. 1998년 4월 맺은 굿 프라이데이 협정(성 금요일 협정이라고 하며, 원명은 The Belfast Agreement/Comhaontú Bhéal Firste이다) 이후 갈등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브렉시트 이후 협정과 상충되는 부분들 때문에 갈등이 재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iii] 본 평론이 일종의 표면읽기라면 그의 제작기록은 상세한 부도에 해당한다. 작품의 이해를 위해 (가능하다면)필독을 권한다.

 

[iv] 시각예술전문공간이 아닌, 불특정 다수가 교차하는 공연의 장소라는 점에서 행위 주체의 미적 발화와 타자의 심리가 밀착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v] 송주관.

 

[vi] 모든 이미지는 삶과 사회, 외부와 내부, 나와 우리라는 범주에 고정된다. 공통적으로 공허한 관계성을 대리하는 알고리즘일 수 있으며, 정신과 지각체험을 함의한 인간세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일 수도 있다. 특히 작가에게 이미지란 인간의 신체, 위력 등에 관한 유·무형적 표식이고 세상과 반응하는 글이자 그림이며 언어이다.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심적 이미지나 유형의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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